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드비그 소피아 (문단 편집) === 자녀 === || '''자녀''' || '''이름''' || '''출생''' || '''사망''' || '''배우자/자녀''' || || '''1남''' ||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[[카를 프리드리히]][br]{{{-2 (Charles Frederick, Duke of Holstein-Gottorp)}}} || [[1700년]] [[4월 30일]] || [[1739년]] [[6월 18일]] || 러시아의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[* [[표트르 1세]]와 [[예카테리나 1세]]의 장녀이다.][br]슬하 1남[* [[표트르 3세]]] || 외아들 [[카를 프리드리히]]는 어릴 때 부모인 본인과 남편을 잃어 외증조할머니 헤트비히 엘레오노라 아래에서 순 응석받이로 자랐다. 카를 프리드리히는 오만하고 책임감이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, 이 때문에 왕위는 헤드비그 소피아의 막내여동생 [[울리카 엘레오노라]]가 차지하게 되었다. 자상하지만 엄격한 어머니였다는 헤드비그 소피아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아들의 육아에 성공해서 스웨덴 왕실의 계보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. 이 때 카를 프리드리히가 스웨덴 왕이 되었다면 '''칼 13세'''가 되었을 것이다. 이후 카를 프리드리히는 이모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기회를 엿봤지만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왕위를 남편 [[프레드리크 1세|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]]에게 넘기면서 스웨덴 왕위에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[* 그래도 프레드리크 1세 이후엔 본인의 가문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이 칼 13세 때까지 스웨덴 왕을 배출하기는 했다. ] 스웨덴을 떠났다. 러시아의 힘을 빌어 스웨덴 왕위를 탈환하기 위해 [[표트르 1세]]와 [[예카테리나 1세]]의 딸 안나 페트로브나와 결혼했지만 스웨덴 왕위는커녕 덴마크가 공국을 점점 집어삼키면서 세력은 미약해졌고, 러시아 황위로 눈을 돌렸지만 안나 페트로브나가 훗날 [[표트르 3세]]가 되는 카를 페터 울리히를 낳자마자 20살에 죽어서 러시아 황제가 될 만한 든든한 지원세력을 잃었다. 결국 장인 [[표트르 1세]]의 사후 러시아 혼란상에서 어느 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미 갖고 있던 공국의 영지를 잃은 체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. 대신 그 아들인 [[표트르 3세]]가 이모이자 [[카를 프리드리히]]의 처제인 [[옐리자베타 여제]]에 의해 후계자가 되어서 결국 차르가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